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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우리의 가벼움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이다.
Oye... ¿Ricky?
(야... 리키?)


 나초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입술이 아킬레의 정수리에 닿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침 햇살이 나초의 왼쪽 화상 흉터 위를 비추었고, 반흔 조직이 빛을 받아 분홍빛으로 빛났다. 파도 소리가 창 너머에서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침대 위에는 부스러기가 흩어졌고, 이불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고, 두 남자의 다리가 시트 위에서 뒤엉켜 있었다. 나초가 아킬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Vamos al mar después? Quiero... mostrarte algo.
(...이따 바다 갈래? 보여줄 게... 있어.)


 바지 주머니 속 깊은 곳, 손가락 끝에 닿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 어제 해변의 젖은 모래톱에서 주워 올린 반쪽짜리 조개껍데기가 주머니 안에서 달가닥거렸다. 나초는 그것을 꺼내지 않은 채 주머니 속에서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굴렸다. 바다로 나가 모래사장을 걷다가, 적당히 한적한 그늘 밑에서 불쑥 아킬레의 손바닥 위에 던져줄 생각이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지나가는 일 중 하나인 것처럼.

¿Te vas a quedar mirando mi culo o me vas a dar la mano? Muévete, el mar no se va a quedar esperando a un par de bastardos como nosotros.
(내 엉덩이나 쳐다보고 있을 거야, 아니면 손잡을 거야? 움직여, 바다가 우리 같은 개자식들을 마냥 기다려주진 않는다고.)


 단층집의 현관문을 밀고 나서자,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정오 햇살과 소금기 밴 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서늘하게 쓸어내렸다. 마당의 푸른 잔디를 밟으며 나아가는 발걸음 아래로 더 이상 유리 파편이나 탄피가 밟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전히 비현실적인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아킬레의 손을 잡지 않은 나초의 자유로운 손은 바지 주머니 속으로 파고들었다. 수 년 동안 권총의 방아쇠나 나이프 손잡이만 쥐고 살았던 손가락 끝에, 이런 하찮고 조잡한 자연의 부스러기가 쥐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헥토르의 목을 조르고 저택을 잿더미로 만든 대가로 얻어낸 세상이 고작 이 모래사장의 조개껍데기 하나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나초의 뇌수를 스쳤다.


 

 나초의 시선이 수평선 쪽으로 향했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물비늘 위로 갈매기 몇 마리가 낮게 활강했다. 주머니 속 왼손이 조개껍데기의 톱니 같은 가장자리를 엄지 손톱으로 긁었다. 지금 줄까. 아니, 젖은 손으로 꺼내면 모양새가 빠진다. 나초 카르데나스는 이십 년 동안 사람 목을 따면서도 손끝 하나 떨린 적이 없었는데, 고작 조개껍데기 반쪽 때문에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하찮게 무너진다.

¿Y si nos quedamos aquí hasta que se nos arrugue todo el cuerpo? Como dos idiotas. Sin teléfonos, sin cuentas, sin nadie a quien matar.
(우리 몸뚱이 전부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여기 있으면 어때? 멍청이 두 마리처럼. 전화도, 장부도, 죽일 놈도 없이.)

 

 말을 뱉어놓고 나초는 제 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제 목소리가 낯설어서였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낮추더니, 두 손으로 바닷물을 크게 퍼올려 아킬레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끼얹었다. 물벼락을 맞은 백발이 이마에 척 달라붙는 꼴을 보며 나초가 목젖까지 드러내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드가 뒤로 젖혀지며 흉터로 뒤덮인 왼쪽 얼굴이 정오의 태양 아래 그대로 드러났지만, 나초는 그것을 가리려 하지 않았다. 이제 이 세상에 제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릴 인간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Corre, cabrón! ¡El que llegue último a esa roca se traga toda mi comida quemada durante un mes!
(뛰어, 개자식아! 저 바위까지 꼴찌로 오는 놈이 내가 태워먹은 밥 한 달 내내 처먹는 거다!)

 

 모래톱에서 바닷물을 가르며 내달리는 두 쌍의 맨발이 하얀 포말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젖은 백발과 검은 머리칼이 번갈아 공중에서 춤을 추었고, 물방울이 후광처럼 두 사람의 윤곽을 감쌌다. 아홉 살짜리 고아원의 마당에서 맨발로 쫓고 쫓기던 시절이 그대로 포개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다만 그때의 울타리는 카르텔이 쳐놓은 철조망이었고, 지금 이 울타리는 수평선이었다. 나초의 긴 보폭이 모래를 차올리며 몇 미터 앞을 선점했으나, 아킬레가 순식간에 간격을 좁혔다. 나초가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아킬레의 팔이 허리를 감아챘고, 두 사람은 관성에 못 이겨 젖은 모래 위로 나란히 굴러떨어졌다.


 등짝이 모래에 쓸리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고, 후드티가 배 위로 말려 올라가며 나초의 복근에 박힌 옅은 흉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났다. 흉터 위로 소금기 있는 모래알이 달라붙었다. 나초의 금빛 눈동자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하늘을 한 번 훑었다가, 이내 자신을 깔아뭉개듯 덮친 백발 짐승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달려서인지, 이 새끼가 위에 있어서인지, 구별은 불가능했다. 아킬레의 화이트 티셔츠가 완전히 젖어 아래의 실전 근육 윤곽과 칼에 찔린 흉터 자국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고, 숨을 몰아쉬는 갈비뼈의 리듬이 고스란히 나초의 가슴팍에 전달되었다.

¡Tramposo hijo de puta! ¡Eso es falta! ¡FALTA!
(반칙이지 개자식아! 파울이야! 파울!)

 

 나초의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그의 왼쪽 주머니에서 조개껍데기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허벅지에 찔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달리는 도중에 깨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나초는 잠시 아킬레의 초록빛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정오의 햇살이 저 숲 같은 녹색 안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스물아홉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선물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건을 주는 일은 항상 뇌물이거나 협박이거나 위계였다. 그런데 지금,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이 하찮은 조개 반쪽은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다. 지금 그냥, 이 새끼의 하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이그나시오 카르데나스의 이십 년짜리 도살 이력에서 가장 무해하고, 동시에 가장 폭력적인 행위. 반쪽을 나눈다는 것.

...Ricky.
(...리키.)

 

 나초는 모래투성이 왼손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넣었다. 손가락 끝이 조개껍데기의 물결무늬를 한 번 더 확인하듯 더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꺼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인 것은 크림빛 반쪽짜리 조개. 파도에 닳아 모서리가 둥글어졌고, 안쪽에는 옅은 진주빛 광택이 남아 있었다. 나초는 아킬레의 가슴 위에 깔린 채 그 반쪽을 위로 치켜들었다. 태양이 조개 안쪽을 비추며 무지개빛 파편을 아킬레의 백발 위에 흩뿌렸다.

Encontré esto. La otra mitad se la tragó el mar... pero me quedé con esta porque... Tch. Porque me acordé de ti, cabrón. Mitad y mitad. Así éramos, ¿no? Desde el principio. Medio muertos, medio vivos. Medio odiándonos, medio... esto.
(이거 주웠어. 나머지 반쪽은 바다가 삼켰는데... 이쪽은 가지고 있었거든, 왜냐면... 쯧. 네 생각이 나서, 개자식아. 반쪽하고 반쪽. 우리 그랬잖아, 안 그래? 처음부터. 반쯤 죽고, 반쯤 살고. 반쯤 증오하고, 반쯤은... 이거.)

 

 '이거'라는 단어 끝에서 나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놓고 뱉기엔 아직 혀가 익숙하지 않았다. 나초는 조개를 아킬레의 가슴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마치 폭탄의 기폭 장치를 건네듯 조심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수류탄 핀을 뽑아 던지듯 무모하게.

 

 금빛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아킬레의 반응을 훑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눈을 접어 웃으면, 그제야 나초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하찮은 껍데기가 거절당할 리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도 심장이 멎을 것처럼 뛰었다. 인간은 합리적 판단과 별개로 떨리는 짐승이었다.
 아킬레가 웃었다. 눈이 접히고,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가고, 그리고. 보조개가 드러났다. 이그나시오 카르데나스가 이십 년 동안 사람의 경동맥을 눌러 의식을 날려본 횟수보다, 저 보조개를 본 횟수가 더 적었다. 나초의 심장이 한 박자 멈추었다가 두 박자를 한꺼번에 뛰었다. 

 

 모래 위에 널브러진 채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로, 나초는 아킬레의 양손 안에 놓인 크림빛 조개 반쪽과, 그 너머로 부서지는 백발의 윤곽을 동시에 시야에 담았다. 태양이 뒤에서 쏟아져 아킬레의 흰 머리칼을 후광처럼 밝혔고, 짙은 녹색 눈동자 안에 조개의 진주빛이 작게 반사되고 있었다.

...No te rías así, imbécil. Se me para el corazón.
(...그렇게 웃지 마, 멍청아. 심장이 멈춘다고.)

 

 나초의 목소리가 평소의 거친 껍데기를 벗고 낮게 갈라졌다. 욕을 섞었지만 음색은 완전히 무장해제된 채였다. 금빛 눈동자가 아킬레의 얼굴 위를 천천히 떠돌았다. 이마, 눈썹뼈, 코끝, 입술. 마치 지도를 그리듯. 이 얼굴을 스물 년 동안 매일 봤는데, 저 보조개가 나올 때마다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파도가 밀려와 두 사람의 옆구리를 적시고 빠져나갔다. 모래 위에 물거품이 남았다가 사라졌다. 나초는 모래 위에 누운 채 젖은 등짝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아킬레의 티셔츠 앞가슴을 잡아끌어 이마와 이마를 맞부딪혔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두개골 안쪽에서 울렸다. 

 아팠다. 근데 좋았다.

Es solo una puta concha rota, Ricky. No me mires como si te hubiera dado el mundo entero... porque me dan ganas de darte más. Todo. Cualquier cosa. Lo que sea que quieras.
(고작 빌어먹을 깨진 조개야, 리키. 세상 전부를 준 것처럼 쳐다보지 마... 더 주고 싶어지잖아. 전부. 아무거나.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나초 카르데나스는 생각했다.

 스물아홉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물건을 '주고 싶어서' 준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것을 해봤더니 심장이 폭발할 것 같다고. 그리고 이 미친놈이 받아 들고 웃어줬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총알과 칼날을 합쳐도 저 두 글자보다 치명적인 무기는 없다고.

...Quédate con ella. Y si algún día me odias otra vez... mírala y acuérdate de que fui el idiota que te la dio en esta playa de mierda.
(...간직해. 그리고 언젠가 다시 나를 미워하게 되면... 그걸 보고 기억해. 이 좆같은 해변에서 그걸 너한테 준 멍청이가 있었다는 거.)

 

 나초의 몸이 아킬레의 품 안으로 끌려들었다. 가두듯, 이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팔이 허리를 감고, 턱이 정수리 위에 얹혀지고, 허벅지가 허벅지를 끼고 말았다. 새장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감옥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하지만 이 새장의 살대는 뼈와 근육과 비단 같은 백발로 이루어져 있었고, 나초는 이 감옥에서 나갈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완벽한 포위. 기꺼운 항복.

Revolcarnos en la arena como perros callejeros, Me gusta.
(모래밭에서 떠돌이 개처럼 뒹구는 거, 마음에 드네.)

 

 나초가 낮게 웃었다. 나초는 아킬레의 팔 안에서 몸을 비틀어 돌아누웠다. 마주 보는 자세. 이마와 이마 사이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나초의 금빛 눈동자가 아킬레의 녹색 눈동자를 빈틈없이 담았다. 정오의 햇살이 나초의 왼쪽 볼,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 위를 비추고 있었다. 볕이 따뜻했다. 불이 아니었다. 아팠던 것은 이십 년 전의 일이었고, 지금 이 열은 다정했다.

¿sabes qué? Nunca tuve esto.
(있잖아? 난 이런 거 한 번도 없었어.)

 

 나초의 손가락이 아킬레의 심장 위에 멈추었다. 젖은 면직물 아래로 심박이 전해졌다. 느리고 단단한 박동. 이 남자는 항상 심장 박동을 제어하는데, 지금 이 손바닥 아래의 맥박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초만이 알아챌 수 있는 차이. 나초의 입꼬리가 의기양양하게 올라갔다.

Esto. Revolcarme en la arena con alguien... y no querer levantarme nunca. Querer que el sol me cocine aquí, contigo encima, y que me entierren así. Como una puta momia enamorada.
(이거. 누구랑 모래밭에서 뒹굴면서... 영원히 안 일어나고 싶은 거. 햇빛이 나를 여기서 구워도 좋고, 네가 위에 올라탄 채로 이대로 묻혀도 좋고. 빌어먹을 사랑에 빠진 미라처럼.)

 

 나초가 킥킥 웃었다. 자기가 한 말이 웃겼는지, 아니면 자기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웃겼는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이십 년 전의 나초에게, 아니 일주일 전의 나초에게 이 꼴을 보여줬다면 제 자신의 머리통을 총으로 날려버렸을 것이다. 카르텔의 들개가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연인의 품에 안겨 미라 타령을 하고 있다니. 블랙코미디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초는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빨이 드러나고 눈이 접히고 화상 흉터가 접히는 그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나초는 아킬레의 귀 뒤편을 원을 그리며 쓸어내렸다. 아킬레의 두개골 형태를 손바닥으로 느꼈다. 이 두개골 안에 나초를 사랑하는 데 전념하는 뇌세포가 있다는 것을 아까 이 남자가 직접 말했다. 
 나초는 그 빌어먹을 낭비에 대해 아무 불만도 없었다. 아니,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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